마의태자이야기

1. 경주

마의태자는 신라 마지막 왕 56대 경순왕의 태자로서 이름은 김일(金鎰)이다.

천년의 왕국 신라는 나라의 국운이 쇠약해지며 고려와 후백제 등 주변국가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마의태자는 많은 혼돈을 느끼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935년(경순왕 9년) 신라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국권을 이양하려고 하자 태자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의 소중함과 백성의 가치, 그리고 아버지인 경순왕을 바라보며 안타까움과 고민 속에 계속 만류하였으나 경순왕은 결국 김봉휴를 시켜 국서를 보내 고려에 항복하게 되었다.

이에 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오직 충신과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인데 어찌 일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줄 것이랴"고 통곡하며 경주를 떠났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서라벌을 세운지 992년 만에 아버지 경순왕 때에 나라가 망하자 태자는 개골산(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천년수도 금성(경주)을 떠나 영주 부석사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에 들려 조국 신라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였다.

2. 충북 제천(월악산)

경순왕 일행은 나라를 바치고 개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마의태자는 그 일행에서 몰래 빠져나와 나라를 다시 찾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다른 경로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덕주공주도 함께 보고 마의태자 몰래 따라와 경순왕과 다른 이동을 하게 되었다. 궁에서 생활하던 태자와 공주는 고난이 많았으나 신라 부흥의 꿈을 지니고 오대산으로 향하던 중 꿈 속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한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건조하며,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라. 포덕함을 잊지 말아라"고 말하였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는 월악산 정상 아래 기슭에 이르러 구국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불상을 제작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들이 제작한 미륵불과 마애불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신라의 부흥을 위한 한마음 한뜻을 가지고 제작을 하였다. 8년이 지난 후 마의태자는 덕주공주에게 이곳에 남아 부처님이 말한 시기를 기다리고 때가 되면 다시 만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마의태자는 월악산을 떠나 군사를 모으기 위해 북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월악산 그리고 덕주사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피난 와서 마애불을 조성하고 살았다고 하여 산 이름을 월악산, 절 이름을 덕주사, 그리고 절이 있는 골짜기를 덕주골로 불렀다.
지금의 덕주사가 있는 자리를 '하덕주사'라고 불렀으며, 월악산 정상을 향해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 닿는 마애불 주변을 '상덕주사'라 불렀다고 한다.

3. 경기도 양평(용문사)

마의태자는 그 일행을 데리고 월악산을 지나 경기 양평에 오게 된다. 이곳에는 용문사는 신라 선덕왕 2년(913년) 때 대경대사가 창건한 절이 있었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이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바치기로 결정한 뜻을 듣고 아픈 가슴과 천년의 왕국인 신라가 다시 흥하게 되기를 품고 그 먼 길을 의지하여 발걸음을 옮기던 지팡이를 용문사에 심었다. 그러자 그 지팡이에서 가지와 잎이 나고 열매가 맺기 시작하여 오늘날 나이가 천년이 넘고 높이가 67m가 되며 가슴높이의 둘레가 11.3m, 가지의 길이는 동서 29m의 크기로 자라났고 지금도 가을이면 열매를 10가마 이상 수확하는 천연기념물 제30호가 되었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더니 나무에서 피가 흘렀다는 설도 있고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을 때에도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세종대왕은 이 나무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미리 알려 주는 영험함을 가졌다고 하여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하는 '당상직첩'이란 벼슬을 하사하였다고 하며 실제로 나라에 이상한 일이 생기면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 한다.
나라를 향한 마의태자의 염원과 마음을 알 수 있는 나무이다.

4. 인제(마의태자권역)

마의태자는 양평을 지나 홍천을 거쳐 인제로 들어오게 된다. 인제는 마의태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실제 마을에는 마의태자에 대한 전설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마의태자가 신라의 옥새를 숨겼다는 '옥새바위', 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수거너머', 태자를 보필하던 맹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맹개골' 등 여러 지명과 유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김부(金富)는 마의태자 김일의 강원도 인제이름(향찰을 이용하여 만든 이름)으로서 인제에는 김부리가 존재하고 있고 이곳은 마의태자가 일행과 함께 거주하고 백성을 다스렸던 곳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김부리에는 '김부대왕각'이 있어 김부리 주민들이 약 1000년간 마의태자가 평소 즐겨먹던 미나리떡과 취떡 등을 제물로 올리며 제례를 드렸고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인제는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으로 인해 세상을 한탄하며 은둔하기만 한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의태자는 오히려 신라 부흥을 위해 적극적인 준비를 하였다.

김부리 인근의 갑둔리(甲屯里)는 그 이름이 갑옷 갑(甲)과 진칠 둔(屯)이다. 다분히 군사적인 진지 이름이다. 갑옷을 만들었다기 보다 진을 친 첫번째 진으로 '갑둔'이고 다른 곳에 '을둔리' 등이 있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곳의 항병골이라는 골짜기 이름도 항병(抗兵)이 의미하는 것이 신라부흥운동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
대관령으로 대표되는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세 고개인 한계령, 진부령, 대관령 가운데 진부령은 본래 '김부령(金富嶺)'이었다고 전하는 것은 '김부'가 '진부'로 발음될 수 있다는데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김부령'이란 경순왕이 또는 경순왕의 명을 받아 부흥군을 이끌었을 마의태자가 넘던 고개라는 의미에서 나왔을 수 있는 것이다. 인제의 '행차고개'도 임금의 행차가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듯이 신라의 마의태자 일행이 넘어가던 고갯길이 오늘날 '진부령 고개'의 이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인제군 한계리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한계산성을 쌓아 만에 있을 전쟁에도 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5. 개골산(금강산)

마의태자가 갔다고 하는 이름을 '개골산(皆骨山)'이라 한 것은 그 개골이라는 이름이 '모든 것이 해골'이라는 죽음의 골짜기를 의미한다. 그만큼 고려시대에서 신라의 마지막 왕자의 신라부흥운동을 죽음으로 인지시키려 노력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금강산이 모반죄를 지은 역모자에게 유배지로 나오는 것과도 의미가 통해 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 초식을 하다 죽었다는 설에 대하여 최초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다. 20세기에 최남선은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를 둘러본 뒤에 <금강예찬(金剛禮讚)>(1927년)이란 기행문에서 마의태자 금강산 은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신라 태자의 유적이란 것이 전설적 감흥을 깊게 하지만 그것과 역사적 진실과는 딴것입니다. 첫째 세상만사를 다 끊고 이 깊은 산골에 들어온 태자에게 성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태자의 계마석(繫馬石)이니 마구간(馬廐間) 터니 하는 것은 다 옛날 예국 때의 천제단이요, 태자성(太子城)이란 것도 제단으로 들어가는 성역 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최남선은 태자성을 옛날 예맥국 천제단의 흔적으로 보려한 것이다.
마의태자의 태자성이 둘이나 있다든지, 망군대와 장군봉이라는 지명 등이 의도적인 왜곡이라기보다 신라 멸망으로 금강산으로 숨어 들어가서 사찰에 귀의한 신라 귀족들의 염원이 그렇게 지명 등을 바꾸었을 개연성이 있다. 고려가 멸망했을 때 70인의 충신들이 두문동에 들어갔던 것은 오백년 후의 일이었다.
금강산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신라의 이미지가 강조되자 고려왕조에서는 이를 희석시키기 위한 활동이 나왔을 수가 있다.
마의태자의 유적이 금강산과 인제의 설악산에 남아 있다면 오히려 더욱 많은 사료들이 신라 왕실의 후예가 여진으로 가서 금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6. 금나라

마의태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갔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적은 『송막기문(松漠紀聞)』에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 부족 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에도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밝히고 있다.

『만주원류고』에는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고 했다"며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임을 밝히고 있다. 금나라로 간 신라인에 대해서는 『고려사』에서도 그 기록을 전하고 있다. 금의 조상이 된 사람은 평주(平州)의 승려로, 이름은 금준(今俊) 혹은 김극수(金克守)이며, 여진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마의태자(김일)의 아들 김준(金俊)이 金나라를 세웠다는 주장은 <고려사> 의 금준(今俊)이 金나라 시조라는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金나라 시조 아골타에 대하여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金나라의 시조다'라고 하며.."
만주 대륙으로 올라간 평주의 승려 금준은 부족의 지도자가 됐는데,『금사』에 의하면 당시 두 부족 간에는 오랫동안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함보가 현재의 법규에 해당하는 조항을 만들어서 부족 간의 싸움을 끝맺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함보는 여진족의 신망을 받으며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금준은 부족의 지도자가 되었고, 200여 년이 흐른 뒤 그 후손이 금나라를 세웠다. 훗날 금나라 건국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신라 재건에 대한 의지가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의 태자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로 고려에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마의태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그의 최후의 행적을 추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인제에 남아있는 유적과 전설을 토대로 쓰러져버린 신라를 재건하고자 했던 마의태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신라인들의 부흥의지가 있었기에 그 불씨는 만주대륙으로 이어져 새로운 역사를 만든 것이다.